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콘라트 아데나워 (문단 편집) === 제2차 아데나워 내각(1953~1957) === 1953년 동베를린 지역에서 생필품을 요구하며 노동자들이 일으킨 이른바 [[1953년 동독 사태|동독 사태]]에 대한 소련군의 무자비한 진압은 아데나워에게 손쉽게 재선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한편 1950년에는 프랑스의 강력한 반대에 의하여 접을 수 밖에 없었던 아데나워의 재무장의 꿈이 4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1954년쯤 되자 연합국 지도자와 일반인들에게 거부감이 이전보단 많이 희석되었고, 냉전이 세계 곳곳에서 격화되면서 미국은 유럽에서 소련을 억제할 세력을 키울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물론 [[프랑스]]의 여론은 여전히 플러베 계획에 대해서조차 강경한 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프랑스인들은 후일 아데나워보다 더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정치인이 독일의 지도자 자리에 올랐을 때, 독일의 재무장이 어떤 부메랑으로 그들에게 돌아올지에 대한 확신을 도무지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이미 악용된 사례가 있으니 더 그렇다.[* 쉽게 말해 일본의 재무장을 한국이 바라보는 시선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게다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의 참패로 프랑스 내부의 여론은 더욱 강경해진다. 자신들이 과거 [[식민지]]로 통치하던 지역에서조차 패하였다는 사실은 프랑스의 군사적인 자신감을 크게 떨어뜨리면서 독일에 대한 공포심을 재차 키웠고,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나면서 프랑스 군의 주력이 유럽 본토로 복귀함에 따라 서독의 재무장이 필요없게 되었다는 주장을 펼치는 목소리가 거세진 것이다. 같은해 ~~[[국공합작]]~~민족전선과 공산당마저 손을 합쳐, 프랑스 의회는 독일의 재무장안을 부결시킨다. 이에 아데나워는 연합국 측과 재무장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을 논의하기 시작한다. 상황은 아데나워에게 유리했다. 미국 외교가는 과거의 악몽은 떨쳐버리고 현재의 안보 상황에 좀 더 집중하자는 식이었고, 영국은 소련의 도발을 방지하는 한 편으로, 유사시 독일의 군국주의를 방지하기 위해 라인란트 지방에 자국군 4개 사단을 배치시키겠다면서[* 라인라트 지방에 배치된 영국군을 라인 사단이라고도 한다.] 프랑스를 설득하고 있었다. 아데나워 역시 대량 살상 무기의 포기 및 군함 건조량 제한 등의 군비 축소를 약속하고, 프랑스 의회의 독일 재무장 안 부결이 독일인들의 분노를 일으켰다며 '이는 네오나치의 부활을 이끌 수도 있다'는 식의 은근한 협박도 내세우면서 프랑스를 설득하는데 총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마침내 1955년 아데나워는 연합국에게 [[독일연방군|연방군]](Bundeswehr)의 설립을 허가받았고 같은 해 나토 가입도 공식적으로 승인되었다. 또한 우수한 공업 기술과 효율적으로 운영되는 기업들, 그리고 매우 유능한 [[경제관료|관료]]집단을 가진 독일은, 미국의 [[마셜 플랜|경제적 지원]]과 함께 [[시장경제]]의 확고한 신봉자였던 기업인 출신의 경제부 장관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의 활약에 힘입어 이 무렵 독일의 경제는 전쟁 발발 이전의 수준을 회복한 데 이어, 무서운 속도로 빠르게 성장한다. 소위 말하는 [[라인강의 기적]](독일어로는 Wirtschaftwunder[* 경제기적이라는 의미이다.])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와 함께 1957년 로마 조약이 조인되었고 서독은 유럽경제공동체 창설에 참여하고 가입하면서 서유럽 경제질서에도 편입하게 되었다. 이시기 아데나워는 [[소련]]과도 외교적 담판을 벌이는데,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십 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당시 수많은 [[독일군]] [[포로]]들은 아직도 소련의 [[시베리아]] 및 노동수용소에 억류되어 있었다.[* 일반 포로들은 비용문제로 인해 시간을 두고 석방해 동독으로 보낸 소련군이었으나 무장친위대 소속 혹은 동독행을 거부한 포로들은 이 때까지도 억류상태였다.] 그리고 이들의 귀환 문제를 교섭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간 아데나워는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 [[니콜라이 불가닌]] 총리와 회담을 갖는다.[* 소련 측의 도청을 우려해서 자동차부터 모든 사무실 집기를 독일에서 싣고 갔다고 한다.] 2차대전의 앙금도 앙금이고, 철저한 반공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만남이었던 만큼 회담 분위기는 시종일관 화기애애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아데나워의 전쟁 포로 귀환 요구에 대하여 흐루쇼프는 그들은 침략자일 뿐만 아니라, [[독일의 전쟁범죄|각종 학살 및 강간 등 범죄]]를 저지른 전범이라고 응대했고, 아데나워 역시 전쟁 후반기 독일 땅으로 진격한 [[소련군]]의 행태 역시 [[연합군에 의한 독일 점령 기간의 강간|별다를 바 없었다고]] 맞받아쳤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협상은 성공적이었고, 1953~1955년에 걸쳐 전쟁 후 살아남은 독일군 포로들은 귀환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1955년]] [[9월 13일]] 서독과 소련은 국교를 정상화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